최초의 원자폭탄의 개발 : '맨해튼 프로젝트'에 관한 흥미로운 사실들.
최초의 원자폭탄의 개발 : '맨해튼 프로젝트'에 관한 흥미로운 사실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발생한 맨해튼 프로젝트는 미국 정부가 원자폭탄을 연구하고 개발하여 사용하려는 프로젝트였습니다. 전 세계 수천 명의 과학자들을 동원하고 여러 대륙에 걸쳐 진행된 이 프로젝트는 결국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두 개의 원자 폭탄이 투하되었습니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시작
1939년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아인슈타인으로부터 긴급한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내용은, 최근에 물리학자들이 우라늄으로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발생시켜 폭탄 제조가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는 것이었고, 아인슈타인은 히틀러가 이미 우라늄을 비축하여 폭탄을 만들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아인슈타인의 편지는 미국이 행동을 취하게 만들었습니다. 미국은 비밀 프로젝트에서 최고의 물리학자들을 동원하여 연구개발을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 연구진의 목표는 두 개로 나뉜 원자에 의해 방출된 에너지를 이용하는 원자 폭탄이 실제로 가능한지 알아내는 것이었으며, 1942년까지 독일보다 먼저 폭탄을 만드는 것을 중요시 하였습니다. 미국이 진주만 공습으로 1942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할 무렵, 이 프로젝트는 수만 명의 과학자와 민간인을 모집하고 있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라는 코드명이 붙게 되었습니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과정
핵무기 연구는 2차 세계대전에 미국이 개입하기 전에 시작되었으나 초기의 연구는 이론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맨해튼 프로젝트가 시작되면서 연구는 전쟁에서 사용할 수 있는 폭탄을 만드는 것으로 변하였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1941년 가을까지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은 우라늄위원회의 책임자이자 핵 연구를 주도한 베네바르 부시(Vannevar Bush)는 원자 폭탄이 개발 가능하며 1년 안에 완료될 수 있다고 루즈벨트를 확신시켰습니다.
결국 이 프로젝트의 책임자로 미 육군 공병대의 그로브스(Leslie R. Groves)가 임명되었으며, 전국의 수천 명의 과학자들이 도움 요청을 받았습니다. 이 프로젝트의 첫 단계 중 하나는 연쇄 반응(폭발을 유발하기에 충분한 에너지를 방출할 수 있는 분할된 원자의 결합)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맨해튼 프로젝트가 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아 엔리코 페르미(Enrico Fermi)와 레오 스질라드(Leo Szilard)는 이 목표를 달성한 최초의 과학자가 되었습니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보안유지는 어떻게?
그 이름에도 불구하고 맨해튼 프로젝트에 대한 연구는 캐나다, 영국, 벨기에 콩고 및 남태평양 지역뿐만 아니라 미국 전역에서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민감한 연구는 로스 알라모스 국립연구소(Los Alamos National Laboratory)에서 진행되었고, 이 연구소는 뉴 멕시코 북부의 외딴 산에 위치하여 1943년에 설립되었습니다. 특히 로스 알라모스에서 원자폭탄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미국 정부가 비밀리에 추진하여야 했기 때문에 로스 알라모스의 외진 위치는 프로젝트의 목적을 비밀로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폭탄을 만들기 위해 과학자들은 많은 양의 불안정한 방사능 우라늄이나 플루토늄이 필요하였고 우라늄은 플루토늄보다 얻기 쉬웠지만, 과학자들은 플루토늄이 폭탄 개발에 더 빠른 경로를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두 가지 모두를 시도하기로 결정했고, 결국 테네시 동부 오크릿지 우라늄 원자로와 워싱턴 핸포드에 플루토늄 원자로를 건설하였습니다. 특히 이러한 시설을 건설하고 운영하는데 수만 명의 사람들이 필요했는데 수많은 과학자와 관리 직원 및 행정 직원과 비서들이 동원되었으며, 전쟁이 끝날 때까지 5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수만 명의 사람들을 고용할 수 있을지와 보안유지는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하였고, 결국 비밀 도시를 만드는 결정을 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근로자와 그 가족을 수용하기 위해 새로운 원자로 주변에 도시가 건설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날 무렵 핵무기의 연구개발을 위하여 오크릿지는 인구 7만 5000명, 핸포드는 인구 5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도시들은 지도에 나타나지 않았고 대부분의 근로자들은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 프로젝트를 비밀로 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었음에도 원자폭탄의 존재는 프로젝트를 위해 노력한 사람들을 포함한 전 세계 사람들에게 여전히 놀라운 것으로 다가왔습니다.
맨해튼 프로젝트로 인한 원자폭탄의 사용
1945년 7월 16일 '가제트(Gadget)'라 불리는 최초의 원자폭탄이 준비되었습니다. 로스 알라모스에서 약 150마일 떨어진, 조르나다 델 무에르토 사막(Jornada Del Muerto Desert)에서, 연구원들은 세계 최초의 핵무기 실험인 '트리니티 테스트(Trinity test)'를 실시했습니다.
맨해튼 프로젝트가 시작된 이후 몇 년 동안, 맨해튼 프로젝트의 목표는 급격하게 바뀌었습니다. 더 이상 폭탄을 만들기 위해 독일과 경쟁을 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게 되었고, 대신에 미국 정부의 시선은 일본으로 쏠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트리니티 실험 직후 남태평양 티니안 섬에 '리틀 보이(Little boy)'라는 우라늄 폭탄과 '팻 맨(Fat man)'이라는 플루토늄 폭탄 두 개가 조립돼 폭격기가 일본으로 시험 비행을 시작했습니다.
1945년 8월 6일 두 개의 원자 폭탄이 일본에 떨어졌습니다. '리틀 보이(Little Boy)'는 히로시마에 투하되었고 불과 3일 후인 8월 9일 나가사키에 '팻 맨(Fat man)'이 투하되었습니다. 최초의 폭발로 약 11만 명이 사망하였고 그로부터 1주일도 지나지 않아 일본은 연합군에 항복해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결과
맨해튼 프로젝트의 일부 과학자들은 맨해튼 프로젝트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지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폭탄을 만들기 위해 독일과 경쟁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실제로 폭탄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거리낌이 있었습니다.
실라드(Szilard)는 그 반대자들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폭탄이 투하되기 전에, 트루먼에게 도시에 폭탄을 투하하지 말라고 청원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맨해튼 프로젝트가 끝난 후 그는 물리학 공부를 그만두고 생물학에 입문하였습니다.
폭탄 제조에 참여한 일부 과학자들은 원자폭탄의 위협이 모든 전쟁을 종식시킬 것이라고 진지하게 믿었지만 그것은 실패였습니다. 원자 폭탄의 개발은 핵무기의 경쟁과 냉전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맨해튼 프로젝트는 제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키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한가지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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